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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113195
한자 土幕里
영어공식명칭 Tomak-ri
이칭/별칭 토막리(土莫里)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지명/고지명
지역 경기도 구리시
시대 조선/조선,근대/근대
집필자 손승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변천 시기/일시 1914년 - 양주군 구지면 토막리에서 양주군 구리면 토평리에 통합

[정의]

경기도 구리시 토평동을 구성하는 지역의 옛 지명.

[개설]

토막리(土幕里)는 일제에 의해 행정 구역 개편이 이루어진 1914년 이전에 양주군 구지면에 속하였다. 1914년 일제 강점기 행정 구역 개편에 따라 토막리의 대부분 지역은 양주군 구리면 토평리에 통합되었고, 토막리의 일부 지역은 양주군 구리면 아천리에 속하게 되었다.

[명칭 유래]

토막리는 한강을 건너기 위해 나무토막으로 만든 작은 배를 타고 건너던 곳이라는 데에서 지명이 생겨났다는 설이 있다. 본래 토막(土幕)이란 일제 강점기에 생활이 어려운 사람들이 사유지에 움막같이 건설한 집을 가리킨다. 1880년대에 제작된『구한말 지형도』 '송파진'에는 토막리(土莫里)로 표기되어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는 다르게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토막리 일대가 한강 변의 충적지이므로 모래는 많지만 흙은 많지 않다는 의미를 내포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형성 및 변천]

토막리는 1914년 일제 강점기 행정 구역 개편에 따라 양주군 구리면 토평리에 속하게 되었으며, 1973년 구리읍으로 승격하면서 양주군 구리읍 토평리가 되었다. 1980년에 양주군에서 분리하여 남양주군 구리읍 토평리가 되었고, 1986년 구리읍이 시로 승격하면서 구리시 수평동으로 편제되었다. 구리시 수평동은 1996년 1월 수택 1동, 수택 2동, 수택 3동이 신설되면서 폐지되었고, 이 과정에서 토막리에 해당하는 지역은 수택 3동으로 편성되었다. 현재 구리시 법정동 가운데 하나인 토평동 지명은 토막리(土幕里)의 첫 글자와 평촌리(坪村里)의 첫 글자를 각각 합해서 생겨났다.

토막리 일대는 한강왕숙천의 충적층에서 형성된 모래 성분의 토양으로 이루어져 토질이 비교적 양호하였으며, 일제 강점기에는 약 30호가 농경 활동을 하면서 거주하였다. 구리시의 도시화에도 불구하고 토막리에 속한 지역은 근교 농업의 발달과 함께 농촌적 성격을 아직까지 간직하고 있으며, 대부분 시설 재배 지역으로 남아 있다.

[위치 비정/행정 구역상의 구분]

토막리의 위치는 왕숙천한강이 만나는 지점에서 한강을 따라 서쪽으로 뻗은 한강 변으로, 맞은편은 한강 남쪽의 서울특별시 강동구 암사동이다. 법정동으로는 구리시 토평동에 속하고, 행정 구역상으로는 구리시 수택 3동에 해당한다.

[관련 기록]

1880년대에 제작된 『구한말 지형도』 '송파진'에서는 토막리(土莫里)로 기록되어 있고, 1914년 일제 강점기 행정 구역 개편 내용을 정리하여 1917년에 발행한 『신구 대조 조선 전도 부군 면리동 명칭 일람』과 1926년에 제작된 『조선지형도』 '뚝도' 등에서는 토막리(土幕里)로 기록되어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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