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렉토리분류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112021
한자 漢江
영어공식명칭 Hangang
분야 지리/자연 지리
유형 지명/자연 지명
지역 경기도 구리시 토평동~구리시 아천동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박진희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해당 지역 소재지 한강 - 경기도 구리시 토평동~ 구리시 아천동
성격 국가 하천

[정의]

강원도에서 발원하여 경기도 구리시 토평동·아천동을 통과하는 강.

[개설]

한강은 남한강과 북한강이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양수리 부근에서 합류하여 한강이 된다. 한강의 총 유역 범위는 2만 6018㎞로, 한국에서 유역 면적이 가장 넓은 강이다. 총 유로 연장은 직할 하천 285.4㎞와 지방 하천 120.1㎞ 등을 합하여 481.7㎞에 이른다. 한강이 경기도 구리시 지역을 지나는 구간은 약 5.1㎞이며, 경기도 구리시와 서울특별시 강동구를 경계로 하여 흐른다.

[명칭 유래]

한강은 큰 물줄기를 뜻하는 '한가람'에서 비롯하였다. 삼국 시대 초기까지는 '대수(帶水)'라고 불리었고, 광개토 대왕비에는 '아리수(阿利水)'라고 기록되어 있다. 백제에서는 '욱리하(郁利河)'라 불렀다. 『삼국사기』 지리지에는 '한산하(漢山河)' 또는 '북독(北瀆)'이라 표기한 기록이 남아 있다. 한강이라는 명칭이 붙게 된 시점은 백제가 중국의 동진과 교류하기 시작한 때부터 ‘한수(漢水)’ 또는 '한강(漢江)'이라 불렀다 전해진다. '아리'나 '욱리'는 같은 어원을 가진 말을 한자의 음을 빌려 표기하는 과정에서 생긴 차이로 보인다. 현재 한국어의 '어른'이나 '으리으리하다'의 '으리'와 같은 어원으로서 '크다'의 뜻을 가진 것으로 추측되는데, 이는 한강의 '한' 역시 크다는 뜻이므로 가능성이 있는 주장이다.

[자연환경]

한강은 과거 유역 면적이 좁고 하상 계수가 높아 범람이 잦았으나 1980년대 도시 인프라 확충 및 수질 개선 대책으로 마련한 한강 종합 개발 계획에 따라 한강을 준설하고 수중보를 세워 유량을 일정하게 유지하게 되었다. 구리시 구간에 놓인 한강의 제방은 토평제와 왕숙제가 있다. 이로 인하여 둔치를 공원화할 수 있게 되었고, 홍수 피해도 줄일 수 있었다. 왕숙제를 따라 자전거 도로가 만들어져 있다. 구리시를 흐르는 왕숙천구리시 토평동에서 한강으로 합류하며, 과거 치수 시설이 건설되지 않았을 때는 합류 지점에서 홍수 때 범람이 발생하여 구리시 토평동수택동에 피해를 입히기도 하였다. 현재 남아 있는 장자못왕숙천한강으로 흘러들던 구하도(舊河道)[과거에 하천이었으나, 현재 물이 흐르지 않고 하천의 흔적만 남아 있는 지형]의 흔적이며, 한강과 평행하게 자연 제방과 배후 습지가 형성되었던 지형상 흔적이 남아 있다.

[인문 환경]

1. 역사 환경

한강은 한반도 중부에 자리하고 있으며, 정치력이 급성장하던 원삼국 시대와 고대 국가 체제가 정비되는 삼국 시대에 들어서면서 한강 유역은 패권의 각축장으로 부상하였다. 구리시 아차산에서 고구려 보루 및 산성 유적이 발견되었고, 한강 맞은편에 풍납토성이 있기 때문에 이 지역은 고구려한강 이남을 견제하기 위한 전략적 요충지로 활용되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현재 아차산에서 발굴된 유적과 유물을 바탕으로 고구려 대장간 마을을 조성하여 구리시의 고구려 유적을 전시·홍보하고 있다.

2. 취락

한강 변을 따라 수로 등 교통로가 일찍이 발달함에 따라 촌락 역시 일찍이 발달하였는데, 혈연적 관계를 바탕으로 한 동족촌이 형성되기도 하였다. 동족촌은 강안에 바로 입지하기보다 지류나 골짜기를 따라 깊이 입지하는 것이 특징이다. 1930년대 조사된 자료에 의하면 구리시 일대[당시 양주군 구리면]에는 동족촌이 형성되어, 김해 김씨·해주 최씨·밀양 박씨·경주 김씨·파평 윤씨·경주 임씨·동래 정씨·순흥 안씨·밀양 추씨·성주 이씨·전주 이씨·한양 조씨 등 15개의 성씨 집단이 분포하고 있다. 『구리시지』에서도 동족촌의 형성을 엿볼 수 있는데, 급속한 도시화 및 도시 재개발 등으로 원주민이 이주하는 경우가 많아짐에 따라 동족촌이 해체되는 경향을 볼 수 있다.

3. 교통·통신

구리 지역은 한양에서 망우리 고개를 넘어 관동 지방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하였다. 관동 길은 양주군 구지면에서 둘로 갈라졌는데 인창리를 지나 왕숙천-도농리로 연결되는 길과 인창리를 조금 못 미친 곳에서 수택리-수석리-평구역에 이르는 길이었다. 따라서 조선 시대 구리는 한양과 근접한 까닭에 역이 위치하지는 않았지만, 주변 노원역과 평구역의 통로로 교통의 연결지 역할을 한 것으로 짐작된다. 중앙의 목멱산으로 연결되는 봉수는 구리시 아차산에 아차산 봉수가 설치되어 역감 1인, 군인 25인, 보인 50인을 배치하였고 봉수에 관계된 임무를 담당하게 하였다. 봉수대가 일반인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곳은 아니었지만 군사적 측면이 강조되어 설치한 것이므로 교통로와 긴밀한 관계에 있었을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조선 시대 큰 나루로는 5강이라고 하여 광나루·삼밭 나루·서빙고 나루·동작 나루·노들 나루를 들었으나, 큰 나루 외에도 인근 지역을 왕복하는 나룻배를 운행하는 소규모 나루가 한강 변에 많이 설치되어 있었다. 구리시에도 서울특별시 강동구 암사동과 구리시 토평동 토막을 왕복하는 작은 나루인 토막 나루가 설치되어 있었다고 한다. 6·25 전쟁 직후까지 운행하였다고 하며, 옛날에 흙으로 쌓은 막(幕)이 있었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현황]

한강의 구리시 구간은 길이 5.1㎞, 폭 820m이다. 한강을 따라 강변 북로가 놓여 있고, 한강을 건너는 다리로 구리 암사 대교강동 대교가 있어 서울특별시와 구리시의 교통을 원활히 한다. 구리시 토평동구리 한강 시민 공원은 시민들의 휴식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으며, 봄과 가을에 유채꽃 축제와 코스모스 축제가 열린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