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각산1리는 지금으로부터 약 250여 년 전 인동장씨 장만중이 인동 남산에서 ‘좌우 산천을 둘러보니 북쪽에 우뚝 솟아 있는 산과 골짜기가 좋아서 정착’하게 된 곳이라고 한다. 그 후로 마을에 정착한 사람들이 수령이 오래된 나무와 바위, 샘 등 자연 자원과 골짜기마다의 지형적 요소와 특색에 맞게 이름을 붙여서 오늘에까지 부르고 있는 것이다. 옛날 각산1리에서 약목장을 가기...
-
강재희 옹은 몇 년째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매일매일 게이트볼을 치러 다니신다. 게이트볼 회원들과의 친분 때문이기도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운동은 거르지 않고 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다. 그런 생각은 젊은 시절 고된 농사일로 많은 병을 앓으면서 터득한 생활의 지혜와도 같다고. 규칙적이지 못했던 농사일로 위장병에 걸려 많은 고생을 했다는 할아버지는 위장병을 앓았던 기간에 고된...
-
“1954년 7월 26일 저녁 8시에 산사태로 인해 사람이 21명이나 죽었어요.” 문헌마다 조금씩 다르게 기록되어 있지만 4대째 남창마을에서 살고 계신 사공태 옹은 마치 어제 일처럼 그날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갑자기 폭우가 쏟아졌어. 저 산성 안에 산이 도유림입니다. 그런데 몇 년 전에 도에서 전부 다 나무를 베고 가고 난 뒤에 산이 헐거워져서 그래 됐지. 도가 다 베려...
-
1955년 10월 남창마을 사람들은 현재의 자리에 들어선 집들로 입주를 하게 된다. 예전에 마을 사람들의 논과 밭이었던 자리에 만든 집들로, 모든 집이 완공되기까지는 약 1년의 시간이 소요되었다. 우선 가족 중에 누가 죽었거나 피해를 많이 본 사람들이 1955년 9월부터 1차·2차에 지은 집으로 입주하였다. 당시 1차·2차에 지은 집은 총 21채로 7채씩 세 줄을 나란히 똑같이 지...
-
다부동이 고향이라 부동댁이라 불리는 조남희 씨는 하루에 두세 번 다부동전적기념관 뒤 유학산 산책길로 운동을 나간다. 건강이 좋지 않은 그녀의 올해 나이는 68세. 그러나 조남희 씨는 홀로 아흔이 된 노모를 모시고 살아가고 있다. 아픈 몸으로 노모를 모시고 살아가는 게 힘이 들지 않느냐는 물음에 “누가 뭐래도 도시보다는 시골이 마음대로 다닐 수 있어 좋지 않겠냐.”며 웃기...
-
다부리는 조선시대 다부원(多富院)이 있던 곳으로 가산면에서 남쪽으로 약 4㎞ 떨어진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북쪽에는 유학산(遊鶴山), 서쪽에는 황학산(黃鶴山), 남쪽에는 소야산(所也山), 동쪽에는 오계산(午鷄山)이 마치 병풍처럼 마을을 둘러싸고 있어 아담하고 아늑하게 느껴지는 곳이다. 이제부터 이곳 다부리에서 하늘과 산, 도로와 원의 이야기를 들어 보자. 가산...
-
동명면의 면소재지에서 동북으로 약 6㎞ 지점에 위치한 남원리는 1941년 칠곡군 동명면에 편입되었다. 남원리는 가산산성이 있는 팔공산 남쪽 기슭 중턱 해발 400m 지점에 외따로 떨어져 있는 산간벽촌이어서, 주말에 남원리를 가게 되면 팔공산과 가산산성을 오르기 위한 등산객들을 많이 만나게 된다. 팔공산과 가산산성을 오르는 경로는 다양하지만, 그중 가...
-
매원2리 마을회관 바로 뒤편 서매에 위치한 감호정사(鑑湖精舍)는 석담(石潭) 이윤우(李潤雨)[1569~1634] 공이 만년인 1623년에 소재(小齋)를 지어 감호당(鑑湖堂)이라 편명(扁名)하여 편히 쉬며 강학을 하던 곳이다. 석담 선생이 이곳에 감호당을 짓고 눌러앉은 것은, 1616년(광해군 8) 5월 직권 세력인 대북파(大北派)의 전횡을 못마땅하게 여기시어...
-
매원리에서는 2008년 8월부터 지금까지 골프장 건설로 인한 환경오염에 따른 보상을 요구하며 평화적 집회시위를 진행하고 있다. 소바우골 아래 매원천을 사이에 두고 마을 맞은편에 텐트 4동과 모닥불로 매일같이 그 곳을 지켜온 마을 사람들은 하나같이 하천의 오염을 걱정하고 있었다. 그 곳에 가니, 텐트 한 동에서는 집회현장에 모인 마을 사람들을 위해 식사를 마련하...
-
웃갓마을에서 마을의 전설을 비롯한 옛이야기와 문중과 관련한 이야기를 들려줄 만한 분이 계신가 하고 여쭈어 보았을 때 대부분 마을 사람이 추천해 주신 분이 강재희 옹이었다. 그러나 며칠째 마을회관이며 할아버지 댁이며 그 어디에서도 뵐 수가 없었던지라 ‘키 큰 할아버지’에 대한 궁금증은 날로 늘어만 갔다. 결국 할머니와 대신 약속시간을 정하고 조사 마지막 날 뵙게 된 할아버...
-
매원마을이 시작되는 삼거리슈퍼에서 마을을 따라 늘어선 마을 안길 한가운데 촘촘한 담벼락을 따라 조그만 골목길로 들어서면 단정하게 정리된 해은고택을 만날 수 있다. 1788년(정조 12)에 이동유(李東裕)[1768~1836]가 건립한 가옥으로,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75호로 지정되어 있다. 사랑채는 1816년(순조 16)에 건립되었으며, 손자인 이이현(李以鉉)의 호를 따...
-
상주가 고향인 풍산류씨 류재두 할머니는 100세가 가까운 나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단아하고 고운 모습을 간직하고 계셨다. 류재두 할머니가 웃갓마을로 시집을 오게 된 것은, 류재두 할머니의 친오빠와 경북고등학교 동기였던 시아버지가 아들 이용기와 류재두 할머니의 혼인을 성사시켰기 때문이란다. 그 때 할머니의 나이는 열일곱 살로, 상주국민학교 졸업을 앞두고 얼떨결에...
-
한국전쟁 이후 웃갓마을에서도 새마을운동이 시작되면서 마을의 길들이 넓어지기 시작했다. 예전 소달구지 하나가 겨우 지나갈 정도의 넓이였던 마을의 길들이 점차 넓혀지고, 도로에 차들이 다니기 시작하면서 웃갓마을에도 개발이 시작되었다. “새마을운동 하기 전에는 촌에 여기는 기가 막혔지(아주 열악했지), 지금 다니는 길 가운데에도 또랑 물 내놓고 물이 철철 내려가고, 비오면 (홍수가 나고...
-
매원리를 둘러싼 여러 개발 중 특히 골프장 건립은 마을을 여러 면에서 변화시켰다. 2008년부터 이슈화되고 있는 환경오염으로 인한 보상 문제로 마을 입구에서 지금도 집회가 열리고 있는데, 사실 이보다 더 큰 변화는 1988년도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1988년도 제일 처음 마을에 생긴 골프장은 경상북도 모 클럽이라는 단체가 운영을 했다. 당시에도 마을 사람들은 반...
-
마을의 모습이 매화와 같아 매원인 매원마을에는 매화나무도 많지만, 유실수인 포도나무도 많고 특히 참외농사도 많이 짓고 있다. 마을에서 소바우골을 바라보면 나지막이 앉아 있는 산 아래 빼곡하게 들어서 있는 하우스들을 볼 수 있다. 참외농사와 포도농사를 같이 한 거냐고 물어 봤더니, 이동진 씨 부인이 다음과 같이 이야기해 주었다. “포도는 좀 뒤에 했지. 참외를 먼저 했는데, 옛날에...
-
조선시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을 겪으며 가산 지역은 영남 내륙의 주요한 군사적 요충지로 인식되었다. 이에 1639년(인조 17) 관찰사 이명웅의 요청으로 내성이 축성되기 시작하여 1700년(숙종 26)에는 외성이 완성되고, 1741년(영조 17년) 관찰사 정익하의 요청으로 중성이 완공되었다. 이렇듯 가산산성은 무려 100여 년에 걸쳐 축조된 산성으로, 1971년 3월 26일 사적...
-
지금은 도로에 묻혀 사라지고 없으나, 어느 마을 어귀에나 있을법한 아름드리나무가 다부리에도 있었다. 그 나무는 다부원을 찾아오는 사람들이 무사히 돌아갈 수 있게 해달라며 기도했던 나무이기도 했으며, 다부리 사람들이 동제를 지내던 나무이기도 했다. 동제나무는 그러나 한국전쟁 당시 불에 타 소실되었고, 그 뒤 마을 사람들은 같은 자리에 옛 동제나무를 대신할 나무를 심고 동제나무라 위하...
-
은행나무는 오래 살며 수형이 크고 깨끗하다. 대체로 다 자란 은행나무는 그 높이가 10~15m에 이르는데, 간혹 40m까지 자라는 것도 있다. 은행나무는 가을 단풍이 특히 아름다운데, 병충해가 거의 없으며 넓고 짙은 그늘을 제공하는 점 등 여러 가지 장점이 있어서 정자목 또는 풍치수, 가로수로도 많이 심고 있다. 다부동전투 의 격전지 유학산! 그 유학산 아래 해...
-
남창마을 사람들에게 옛 남창마을을 기억하는 것은 곧 유년을 추억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일까, 지금은 수풀로 뒤덮여 마을이 있었다는 흔적조차 찾을 수 없는 옛 남창마을 자리에서 어린 시절 마을을 누비며 떡을 사먹고 누가 심었는지도 모르는 돌배를 따먹던, 지금보다 풍요롭지는 않아도 마음 가득 따스함이 전해지던 그 시절을 회상하는 사공태 옹의 얼굴에서 유난히 추웠던...
-
근세 유학자 장승택의 자는 희백(羲伯), 호는 농산(農山)이다. 죽정(竹亭) 장잠의 후손이며, 주부(主簿) 장유량(張有良)의 아들이다. 사미헌 장복추의 문인으로 천자(天資)가 호매(豪邁)하고 인품이 뛰어났다고 전한다. 오직 학문연구에 전심(專心)하여 당대의 유학자로, 사림(士林)의 스승으로 추중되었다. 문하에서 많은 문인이 배출되었다. 8권의 문집과 『입농문답(笠農問答)』, 『예서...
-
온 동네가 글 읽는 소리로 가득했다는 각산1리에는 한때 경상북도 중부 이남에서부터 서남부 경상남도를 중심으로 김해, 밀양, 고성 등 경상남도 전역과 전라도 지역에서까지 조랑말을 타고 글을 배우러 왔다고 한다. 각산1리는 굽이굽이 3~4㎞는 되는 골짜기를 넘어야 보이는 마을로, 들어가는 길은 외길이었고, 양쪽에 여러 마을이 있었지만 대부분 농토가 부족했던지라 가난을 면치 못했다고 한...
-
『(국역)칠곡지』에 의하면, 가산 산정에는 개암산[일명 가산바위]이 있는데, 야사에는 이 바위틈에 쇠말과 쇠소를 많이 쌓아 두었다고 전한단다. 일찍이 신라의 승 도선이 산천을 두루 돌아다니면서 혹 탑을 쌓고 혹 쇠로 만든 물상을 묻어 지기를 진압한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1639년 이명웅이 경상도관찰사로 와서 가산산성을 쌓으면서 그 쇠소와 쇠말을 파서 버리고 한 산을 뚫...
-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38선 전역에 걸쳐 일제히 기습남침을 감행했던 북한군은 무인지경을 헤쳐 내려오듯 이 나라 이 강토를 휩쓸며 내려오다 그해 7월 말경 낙동강 주변까지 이르게 되었다. 이제 국군과 유엔군은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는 절박한 상황에 처하게 된 것이다. 이에 미 제8군사령관 워커 장군은 낙동강 방어선을 구축하였다. 이 방어선은 낙동강에서 북한군의 공격을...
-
낙화담(洛花潭) 과 관련하여 전해 오는 이야기는 웃갓마을뿐 아니라 칠곡군의 여러 지역에서 비슷한 내용으로 회자되고 있다. 낙화담이 있던 곳은 웃갓마을 뒤편 암석으로 된 산 아래로, 이 산은 산세가 바라[鉢]처럼 생겼다고 해서 발암산(鉢巖山) 혹은 바래덤으로 불린다. 낙화담과 관련하여 전해 오는 이야기는 크게 세 종류로 구분되는데, 세부적인 면에서는 조...
-
만약 남창마을에 사공태 옹이 안 계셨다면 우리는 그처럼 풍요로운 남창마을 이야기를 어디에서 전해들을 수 있었을까? 살아 있는 남창마을 생활박물관처럼 어르신의 유년기와 청년기의 하루하루에는 남창마을 역사가 오롯이 녹아 있었다. 2009년 77세가 되시는 사공태 옹은 요즘도 1년에 다섯 번은 가산산성을 오르실 만큼 건강하시다. 또한 나이가 믿기지 않을 만큼 총총한 기억력과 듣는 이의...
-
가산산성을 오르는 많은 등산객 중 누가 과연 산성 안에 마을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까? 남창마을 사람들이 현재의 자리로 이주한 지도 벌써 반세기가 지나서, 그나마 사람들의 기억력을 감안할 때 지금 70대가 넘은 마을 어르신들이 다 돌아가시면 옛 남창마을의 추억도 사라져 버릴 위기에 처해 있다. “도호부가 있고 성이 있고 성 안에 사람이 오래 살았으니까 이야기가 있겠...
-
현재의 남원2리, 곧 남창마을은 1954년 집중 폭우로 원래의 남창마을이 유실되기 전까지는 남창마을의 논밭이 있던 자리이다. 마을 어르신 중 한 분이 그때의 일을 회상하며 “농사를 이까지(여기까지) 지으러 와야 했지. 등허리 지게에 담아가 짊어지고 저 올라가면 오전에 한 짐, 오후에 한 짐, 두 짐밖에 못 져.” 하신다. 가산산성 안의 마을에서 논과 밭이 있는 현 남창마...
-
2009년 현재 남창마을을 대표하는 것은 친환경 우렁이농법으로 재배한 쌀이다. 약 10여 년 전 원당마을에서부터 시작된 우렁이농법은 우렁이 각시 이야기처럼 마을 사람들의 일손을 덜어주며 마을 경제의 중심축이 되었다. “모심어 놓고 풀 나지 마라고(말라고) 제초제 치고 이라는데 그걸 여(여기) 놓으니끼네 농약도 덜 가고, 이기 자라면서 다 먹더라고…….” 논에 우렁이를 넣어 놓으면...
-
김병탁 씨의 머릿속에는 나고 자란 각산1리 온 마을이 구석구석 훤하다. 골목골목 집이 몇 채나 있는지, 그 집에는 누가 살고 있는지, 또 지금은 사라져 버린 옛날의 마을 풍경은 뭐였는지까지. 산골마을 골짜기 골짜기마다 무엇이 있고 이름은 무엇인지. 심지어 그 이름의 유래까지……. 마을의 토박이로서 그의 고향 사랑은 그의 기억만큼이나 특별하다. 2009년 현재 마을 입구에...
-
농촌마을이라 해도 한마을에서 3대가 살아가는 풍경은 이미 옛이야기가 되어 버렸다. 그러나 집성촌에 종가집 하나 없고 제대로 된 한옥 한 채 없는 남창마을에서 사공택상[55세] 씨네 일가는 선조 때부터 젖먹이 손자까지 줄곧 마을을 떠난 적이 없다. “마을에 좀 뭐든지 위하단 할라카이…… 아버님도 그렇고 아저씨(남편)도 그렇고. 마을에 조그만 그게 있으면은 못 참아, 무슨 고민 겉은...
-
남창마을을 둘러보면 최근에 지은 몇몇 집들을 제외하고는 1955년 입주 당시 모습 그대로, 본채만 조금 수리한 채 옛 모습을 유지한 집들이 대부분이다. 165.29㎡ 정도 되는 집의 마당으로 들어서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게 마당 한 켠에 서 있는 감나무 한 그루이다. 1955년에 지어진 집은 반접집 형태로 세 칸인데, 세 칸 중 부엌이 크고 2개의 방은 똑같은 형태...
-
마이켈리스 대령이 지휘하는 미 제27연대는 워커 사령관이 그 용맹을 높이 평가하는 미 8군 예비대로서, 진동리와 영산 등 위급한 전선에 투입돼 전선의 파국을 막은 부대이다. 그래서 이 부대를 달리 소방대라 부르기도 했는데, 이는 곧 급한 곳의 불을 끄는 부대라는 뜻으로 붙인 이름이다. 미 제27연대는 18일 M-26 탱크 1개 중대와 포병 2개 중대의 지원을...
-
대구 북방 22㎞ 지점에 있는 다부동은 대구에 이르는 관문이자, 성주와 안동에서 대구로 통하는 국도가 합쳐지고 왜관에 이르는 지방도로의 시발점이 되는 곳이다. 또 마을을 중심으로 북서쪽에는 유학산이 북방을 향하여 횡으로 능선을 이루고, 그 우측에는 가산과 팔공산에서 뻗은 고지 군으로 둘러싸여 있어 방어에 유리하다. 그리고 만약 다부동이 적의 수중에 떨어지면 당장 대구가...
-
어느 마을에나 있을 법한 조그마한 구멍가게, 현재 다부 IC와 다부동전적기념관을 배경으로 옹기종기 모여 있는 집들 아래 간판은 없지만 마을 사람들에게 담뱃집으로 통하는 그곳에서 부동댁으로 불리는 조남희 씨를 만날 수 있었다. 다부동전적기념관이 생기면서 옛집은 흔적도 찾아볼 수 없지만, 조남희 씨는 지금도 옛집 모습이 눈에 선하게 떠오른단다. “지금 우리 집 있는 그 뒤짝...
-
칠곡군 가산면 다부리에 위치한 다부동전적기념관은 한국전쟁 당시 다부동전투의 승리를 기리기 위하여 1981년 11월 국방부에서 건립하였다. 다부동은 대구 북방 22㎞에 위치한 곳으로, 상주와 안동에서 대구로 통하는 국도 5호선과 국도 25호선이 합쳐지고 왜관에서 이르는 지방도로의 시발점이 되는 곳이다. 마을을 중심으로 북서쪽에는 유학산[해발고도 839m]이 북방...
-
다부리에 다부동전적기념관이 건립된 후 마을의 가장 큰 변화는 마을의 중앙에 새로 생긴 안길과 취락구조의 변화일 것이다. 마을 안길 포장은 국도 5호선 확장공사와 함께 이루어졌다. 또 다부동전적기념관이 건설되면서 과거 논이 있던 자리에 새로운 집터가 마련되면서 마을의 중심도 바뀌었다. 마을 주민 권오생 씨가 당시의 상황을 소상히 이야기해 주었다. “그 도로가 국도 5호선이...
-
정순덕 할머니가 가족과 함께 대구에서 칠곡군 다부리로 이사를 오게 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44년 전이다. 정순덕 할머니의 아버지가 다부리에 이발소 자리가 있다는 소리를 듣고 들어오게 되었다고 한다. 그 당시 다부동은 사람도 많고 손님도 많았던 곳이라 ‘그곳에서 이발업을 하면 대구 보다 더 장사가 잘 되지 않을까’ 하는 믿음에서 이곳으로 이사를 오게 되었다고 한다....
-
1학년부터 6학년까지 전체 학생 수가 32명인 학교가 있다. 1981년 2층으로 교사가 증축된 다부 초등학교가 바로 그곳이다. 보통 초등학교는 1학년부터 6학년까지 6개 학년으로 구성되어 있으나 다부 초등학교는 4개 학년으로 구성된 복식학급을 운영한다. 즉 1·2학년과 4·5학년이 한 반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학생 수는 1학년은 7명, 2학년은 3명, 3학년은 12명, 4학년은 2...
-
1970년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 조남희 씨는 담뱃가게를 인수하여 생계를 이어갔다. 가족의 생계활동은 그녀가 꾸려가는 담뱃가게가 대부분을 차지했고, 일부는 남편이 동네 사람들의 농사일을 도와주고 받은 품삯으로 해결했다. 그런데 담뱃가게를 운영하는 중 그녀는 큰 시련을 겪게 된다. “그래 와가지고 1년 안 돼 내가 몸이 아파 병원에 갔다 온 이튿날 저녁에 담배 도둑을 맞았어요. 그때...
-
매원마을에는 「대원군과 풍각댁 벼루사건」이라는 전설이 내려온다. 풍각댁이라 불리는 이동형은 가난한 선비로서, 대사헌을 지낸 이원록의 현손이다. 그가 곡식이 3천 석이 넘는 부자가 되기까지 유명한 일화가 있다. 이동형은 책을 읽다가 쉬는 시간이 되면 소똥과 개똥을 주워 모았다. 그 거름이 산 무더기처럼 되던 어느 날 사람들이 찾아와 거름을 팔라 했지만, 그는 팔...
-
장상학[1872~1940]의 자는 신로(莘老)이고, 호(號)는 화강(華岡)이다. 장규택(張奎澤)의 아들로, 사미헌 장복추의 문인이다. 어려서 순후총명(純厚聰明)하여 독서하기를 좋아하여 경전(經典)에 정통하였다. 척친(戚親)인 장석영과 심성론(心性論), 사칠변(四七辨) 등에 대한 논변을 끊임없이 주고받으며 학문을 연마하였다고 전한다. 어느 해, 판서(判書) 이명상이 논어의...
-
장시표(張時杓)[1819~1894]의 초명은 응표(應杓), 호는 운고(雲皐)이다. 여헌(旅軒)의 후손으로 인동부 진평리에서 장봉상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증이조참판 장보에게 입양되었다. 파리장서를 초안한 유림단 대표 회당 장석영이 아들이다. 장시표는 어려서부터 남달리 총명하고 재주가 뛰어나 14~15세 때 벌써 경서(經書)에 통달했다. 1849년(헌종 15) 문...
-
1960년대 저수지가 생기면서 모두 물에 잠겨 버렸지만, 예전 마을놀이터와 같았던 저수지 일대에 대한 마을 사람들의 추억은 지금도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참 다양했다. 지천저수지 댐 끝자락에서 하늘을 향해 올려다보면 발암산(鉢岩山)이 우뚝 서 있다. 저수지가 생기기 전 발암산 바로 아래에는 낙화담이라는 못이 있었다. 지금처럼 깊고 풍부하지는 않았지만 인근 산에서 내려오는 개...
-
신동초등학교에서 웃갓마을로 들어서는 입구에서 마을회관으로 들어가기 전 길가에는 조그마한 단층 건물 하나가 서 있다. 웃갓마을에서 유일한 미용실인 한밭머리나라이다. 의자 세 개와 소파 하나 그리고 방 한 칸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미용실인 한밭머리나라는 늘 손님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미용실을 운영하고 있는 김귀자 씨의 고향은 경상북도 문경시 동호면이다. 김귀자 씨는 스무 살이...
-
매원리는 동쪽에는 죽곡산, 서쪽에는 산두산, 남쪽에는 안산, 그리고 북쪽에는 용산이 둘러싸고 있는데, 그 모양이 매화와 같다 하여 매원(梅院)이라 불린다. 마을이 가장 잘 보이는 소바우골에서 매원을 내려다보면 산들로 둘러싸인 마을의 가옥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모습이 매화처럼 보인다. 예부터 마을이 보이는 곳에는 무덤조차 설 수 없던 금장지구 매원리는 지금도 전통의 모습...
-
매원리의 중매와 서매를 잇는 삼거리에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삼거리슈퍼 건물은 120년이 넘는 전통을 가진 가옥이다. 지금은 14년 전 세상을 떠난 홍관호 할머니의 빈자리를 마을 사람 중 한 명이 인수 받아 슈퍼를 이어오고 있지만, 돌아가시기 전까지 홍관호 할머니는 그 삼거리슈퍼에서 40여 년의 세월을 보냈다고 한다. 1924년생인 홍관호 할머니는 매원에서만 14대째...
-
각산1리 주민들의 자랑거리 중에는 1993년 8월 11일 칠곡군목으로 지정된, 수령이 910년 정도 되는 은행나무가 있다. 은행나무는 퉁지미마을 안에 있는 대흥사 입구에 자리하고 있는데, 나무 앞에 큰 돌 두 개가 제단처럼 평평하게 놓여 있어서, 이것만 보면 예전에 이곳에서 제를 지냈으리라 추측되지만, 각산1리가 워낙 양반동네인지라 특별히 동제를 지내거나 그런 일은 없었...
-
양력으로 매월 15일과 30일은 각산1리 노인회 회원들이 점심식사를 함께 하는 날이다. 약 10여 년 전부터 칠곡군 행정과에서 소액이지만 예산 지원이 이루어지면서, 65세 이상 어르신들이 동네 마을회관에서 함께 점심식사를 하시는 것이다. 음식 준비는 노인회 할머니들이 하시는데, 매해 두 명을 당번으로 정한다. 당번을 맡은 할머니는 총 24번의 음식을 준비해야 하기에 할머니들 중 연...
-
2008년 6월 8일 매원리에서는 농업기술센터의 지원으로 ‘매실따기 체험행사’가 진행되었다. 참가신청은 인터넷으로 이루어졌는데, 매실따기 체험행사를 위해 매원리를 찾은 참가자들 중 40%는 대구에서 왔고, 칠곡과 구미에서 각각 20%씩, 그리고 나머지 지역에서 온 사람들이 20%를 차지했다. 대부분의 참가자들은 인근 도시에서 왔으나, 일부는 대전이나 인천 등에서 오기도 했는데, 참...
-
광주이씨가 경상북도 칠곡 지역에서 집성촌을 형성하게 된 것은 광주이씨 선조 둔촌(遁村) 이집(李集)의 증손되는 좌통례(佐通禮) 이극견(李克堅)이 약 500여 년 전 성주목사가 되어 내려올 때 둘째 아들인 승사랑(承仕郞) 이지(李摯)를 책방도령으로 데리고 왔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지는 그 후 팔거현(八筥縣)[칠곡의 옛 이름]에서 가법을 지키는 최하(崔河)의 딸과 결...
-
매원초등학교 에서 매원리로 들어가는 조그마한 길을 따라가면 주유소가 나온다. 이 주유소 앞을 지나 첫 번째 골목길로 약 10m 정도 들어가면 듬성듬성 나 있는 나무 사이로 조그마한 나무 하나가 짚으로 싸여 있다. 이 나무가 13년 전까지 동제를 지내던 매원2리 동제나무이다. 몇백 년이란 세월 동안 마을 사람들이 동제를 지낸 나무라고 하기에는 왜소한 모습인데, 사...
-
가마를 타고 시집을 오던 길, 할머니는 마을 입구에 가마를 세우고 매원이 어떤 동네인가 가마 문을 열고 살펴보니, 상매[현 매원1리]에 돌기와집이 소복이 앉아 있었다고 한다. 남편이 광주이씨 문중에서 항렬이 높은 편이었던지라, 할머니는 갓 시집을 온 새색시였음에도 ‘할매’로 불렸다. 이런 항렬에 따른 호칭이 부끄러웠던 할머니는 집안에 문중 손님이라도 찾을 때면 숨느라 바빴다고 한다...
-
매원리에서는 예부터 매원만의 전통음식을 만들어 왔다. 사시사철 일상생활에서 쉽게 접할 수 있던 떡을 시작으로 제례용 음식과 발효식품까지 전통 그대로 내려오는 음식들이 많다. 기계가 발달하고 문명이 발달할수록 전통 그대로 음식을 만든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닌 게 되어 버렸지만, 전통 그대로 만들 수 있는 음식들은 보존되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 매원리 주민들의 한결같은 말...
-
매원리 사람들은 우리의 전통과자인 다식(茶食) 또한 직접 만들어 먹었다고 한다. 매원리 할머니들은 한국전쟁 당시 다식판이 불에 타 없어졌지만 다식을 만드는 방법이나 종류에 대해서는 여전히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다식은 송화가루, 꿀, 검은깨 등에 따라 나뉜다. 즉 송화가루로 만든 것은 송화다식, 꿀로 만든 것은 꿀다식, 검은깨로 만든 것은 흙깨다식이라 불렀다. 다식의...
-
2009년 매원리를 상징하는 것은 왜관읍에서 매원리로 들어가는 마을 입구에서부터 하천을 따라 길게 늘어선 매화나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매화나무를 마을에 심기 시작한 것은 불과 7~8년 전이었다. 칠곡군화사업의 일환으로 매원리에 시행된 이 정책은 애초에 매원리를 위한 사업이 아니었다고 한다. “이거(매화나무)를 지천면 신동 신리에 거다가 군화 사업하면서 반상회 회보에 나왔더...
-
매원리는 동쪽에는 죽곡산, 서쪽에는 산두산, 남쪽에는 안산, 북쪽에는 용두산이 둘러싸고 있는데, 멀리서 보면 그 모양이 매화와 같다 하여 매원(梅院)이라 불린다. 일부 문헌에서는 ‘매골’이라고 불리기도 하나, 현지조사 결과 매골이란 표현은 현재 쓰이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또 조선시대 이곳에 원(院)이 있어 매원이라 불렀다는 이야기도 전하며, 일설에는 반송·서매·신매·...
-
매원마을은 예부터 마을에서 보이는 곳에는 묘를 쓸 수 없는 금장지구(禁葬地區) 풍습이 전한다. 마을 사람들에 따르면 광주이씨가 매원에 세거하기 시작하면서 이러한 풍습이 생겼는데, 광주이씨뿐만 아니라 타성들까지도 마을에서 보이는 곳에 묘를 쓸 수 없었다고 한다. 마을이 생성되고 500여 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도 금장지구는 여전히 지켜지고 있었는데, 이는 매원에 주요 세거지...
-
현재의 남창마을은 1954년 폭우로 원래 남창마을이 유실된 후 남창마을 사람들이 그대로 옮겨와 살고 있는 마을이다. 마을 입구에는 남창마을 사람들이 마을을 재건하는 데 큰 도움을 준 한국민사원조단의 단장인 미 육군대령 로센펠드 대령을 기념하기 위해 1955년 세운 공덕비가 서 있다. 공덕비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쓰여 있다. DEDICATED/ COL. A. H. ROSENFELD...
-
예전에는 시골 길거리에서 술과 밥을 팔고 나그네에게 잠자리도 제공했던 곳을 주막집이라 불렀다. 우리나라에는 19세기 후반까지도 촌락의 10~20리 사이에는 1개소 이상의 주막이 있었다. 특히 장시(場市)가 열리는 곳이나 역(驛)이 있는 곳, 나루터와 광산촌 등에는 어김없이 주막집이 들어서 있었다. 다부역이 있던 다부리에도 주막집이 있었는데, 다부역이 사라지면서 주막 대신 양조장이...
-
벽진이씨의 시조는 이총언(李悤言)[858~938]으로, 그에 대한 사적은 『고려사(高麗史)』에 실려 있다. 통일신라 말 중앙정부의 통제력이 약화된 틈을 타 후삼국이 정립하면서 군도(群盜)가 발호하는 등 혼란이 극심했으나, 벽진군의 유력한 호족(豪族)이던 이총언은 군정(軍丁)을 단결시키고 군량미를 비축하여 이를 평정, 진압하여 백성을 편안하게 하였다. 벽진군은...
-
농한기가 되면 삼삼오오 마을회관에 모여 고스톱을 치는 게 낙이라는 각산1리 할머니들이지만, 얼마 전까지도 회관에는 여자들이 올 수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바깥출입 역시 자유롭지 못했다고 입을 모은다. 그러면서 할머니들은 “지금 여자들은 시대를 참 잘 타고났다.”며 부러움 반, 놀림 반으로 이야기를 시작하셨다. 요즘 세대에서는 자유롭게 드나드는 친정집이 할머니들에게는 참 가깝고도 먼...
-
정순덕 할머니는 전라북도 고창에서 태어나 한국전쟁을 겪은 후 서울로 이사를 갔다. 서울에서 대구로 시집을 온 뒤 칠곡에 다시 이사를 왔는데, 그 당시 다부동을 기억하면 삭막하다는 느낌밖에 없다고 한다. 전쟁을 겪은 터라 대부분의 가옥들이 오두막집이었고, 담벼락마저 쓰러져 있거나 허물어져 있었다고 한다. 1960년대 중후반 새마을운동이 시작되면서 다부리에서는 약 30명이...
-
2009년 현재 68세인 조남희 씨의 고향은 다부동이다. 다부동에서 태어난 그녀는 스무 살 되던 해 칠곡군 동천[현 대구광역시 동천동]으로 시집을 갔다. 그리고 1970년 온 가족이 함께 다시 고향으로 들어와 정착하였다. 그녀는 그때 담뱃가게를 인수하여 운영해 오다 2008년 4월에 그만두었다고 한다. 시집을 가 동천동에서 살았던 10여 년을 제외하고는 평생을 다부동에서 살아온 조...
-
돛대바위로도 불리는 신동 입석은 웃갓마을 아래쪽인 지천면 창평리에 있는 청동기시대 선돌 지석묘(支石墓)로 1972년 12월 29일 경상북도 기념물 제29호로 지정되었다. 돛대바위는 예부터 마을 사람들에게 웃갓마을의 액운을 막아주는 신앙의 대상물로 여겨졌는데, 웃갓마을이 배의 모양을 띄고 있다고 해서 돛대바위라 불렀다고 한다. 돛대바위는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선...
-
왜관-다부동 전선은 대구를 점령하려는 북한군 4개 사단의 주 공격선이었다. 그리고 이곳은 국군에게도 주 저항선이며 최종적으로 고수해야 할 방어선이었다. 장비와 병력, 수송력 등 종합적인 전력 면에서 볼 때, 북한군은 이곳 전선을 돌파하지 못하면 상대적으로 힘이 빠지게 되어 있었다. 38선에서부터 길게 늘어진 보급로에 미군 폭격이 계속되면서 전력이 바닥이 나 있었던 것이다...
-
웃갓마을 광주이씨 종갓집에 거주하고 있는 이병구 씨는 ‘광주이씨 칠곡파조 이지’의 15세 종손이다. 7년째 그는 석담사당에서 불천위 제사를 모시면서 종택의 안채에서 거주하고 있다. 종갓집은 안채와 사랑채 그리고 사당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2008년 사당을 다시 지으면서 예전에 있던 행랑채는 복원하지 못했다고 한다. 오랜 옛날부터 석담 선생 사당은 칠곡에서 광주이씨 문중의...
-
2009년 현재 동명면 남원리 일대에서 ‘가산산성 별신굿’을 기억하는 사람은 없지만 ‘비신’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더러 있다. 이 ‘비신’을 행한 정확한 연유는 알 수 없는데, 어떤 사람은 이세재가 경상도관찰사로 있을 당시 관찰사를 모시고 고을의 평안과 풍년을 기원하는 행사로 치러진 것이라고 하고, 또 어떤 사람은 가산천왕님을 모시고 10년에 한 번씩 했던 굿이라고도 한다. 그런데...
-
국군 제1사단 백선엽 장군은 미 제27연대 마이켈리스 대령과 협조해 북한군에 대한 대대적인 반격작전을 개시하기로 했다. 8월 21일 아침, 반격을 시작하기로 돼 있었는데 적이 먼저 공격을 가해 왔다. 그때 백선엽 장군은 미 제27연대의 좌측 능선을 엄호하던 11연대 1대대가 북한군에게 제압을 당해 448고지를 빼앗기고 다부동 쪽으로 후퇴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 잠시 후 미 8군...
-
산이 시렁처럼 둘러싸여 있는 가산면에서 유난히 가난했지만 원과 역이 있어 항상 사람들이 북적였던 다부동은 면사무소며 파출소 등의 주요 공공기관을 비롯하여 양조장이며 씨름판 등의 유흥 시설도 위치해 있던 시골 마을이었다. 중앙고속도로와 다부 IC가 생기면서 현재 다부리 주민들의 생활은 대구가 중심이 되었지만,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전후만 해도 다부동은 면에서 가장 번화가 역...
-
다부리에는 새마을운동이 시작되면서 큰 도로와 연결되는 도로들이 생긴 뒤로 사람들이 다니지 않는 길이 여럿 된다고 한다. 그중 하나가 새꼬만데기라고 부르는 길이다. 새꼬만데기는 샛고개에서 나온 말로 추측되는데, 예전에는 동명면으로 넘어가는 험한 고갯길로, 사람들이 주로 나무를 해서 팔러 다니던 길이었다고 전한다. 마을이 워낙 높은 산으로 둘러싸인 곳에 위치하기 때문에 대구...
-
각산1리는 두 개의 저수지를 경계로 북쪽의 산골마을과 서당·재실이 많은 남쪽의 선비마을로 나뉘는데, 인구수에 비해 실제 분포 면적은 다른 마을들에 비해 넓다고 할 수 있다. 선비의 글소리가 사라진 오늘도 천혜의 자연은 살아남아 각산을 빛내고 있는데, 대표적인 곳이 각산1리 북편으로 병풍처럼 둘러쳐진 비룡산이다. 비룡산에는 대흥사와 비룡사, 약사불원 등 3개의...
-
퉁지미마을 에는 현재 대흥사와 비룡사 두 곳을 제외하고 세 가구가 살고 있다. 그리고 그 퉁지미마을에는 산을 닮아 넉넉하고 깊은 품을 가진 김병탁 씨가 산다. 김병탁 씨는 경주김씨로 5대째 각산1리에 살고 있다. 산골에서 살다 보니 서당에서의 추억보다는 산에서의 추억이 더 많다. 김병탁 씨 역시 14~15세 무렵 마을 서당에 다니며 천자문을 배운 적도...
-
매원리는 원래 파미면에 속해 있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매원동이라 하고 왜관면에 편입되었다. 매원리는 2009년 현재 행정구역상 1, 2, 3리로 나뉘나 행정구역 개편 전에는 1, 2, 3, 4리로 구분되어 있었다. 매원리에 위치한 자연마을로는 반송이, 상매, 중매, 서매 그리고 새마[일명 신매]가 있는데, 매원1리는 상매와 반송이, 매원2리는 중매...
-
1920년대 웃갓마을 서원촌 중앙 지점에는 새마(新村) 또는 오부자촌이라고 불린 마을이 있었다. 마을 사람들에게는 ‘새동네’라는 표현이 더 익숙한 이 마을은 약 20여 가구로 구성되어 있었다고 한다. 새동네가 만들어진 것은 1926년 이재문이란 사람과 그의 형제들이 들어오면서부터라고 한다. “한 집이 와가지고 큰 동네를 차린 거야. 한 집에서 자기들이 와서 아들도 살고...
-
대한민국 시골마을이라면 어디든지 하나쯤 있을 것 같은 것이 ‘새마을슈퍼’와 ‘새마을회관’, 그리고 ‘새마을지도자’이다. 벌써 40여 년 전의 일이지만 아직도 시골마을과 새마을이라는 이름은 친한 짝꿍처럼 붙어 다닌다. 1970년대 전국을 들썩이게 했던 새마을운동은 수해의 어려움을 극복한 남창마을 사람들에게도 빛나는 순간을 안겨 주었다. 남창마을, 곧 남원2리의 새마을운동은...
-
지금은 흔적조차 사라지고 없는 곳, 1968년 다부동에 생긴 간이목욕탕은 마을 사람들에게 잊을 수 없는 소중한 추억의 장소이다. 일부 마을 사람들은 한국전쟁 직후에 간이목욕탕이 생겼다고도 하나, 대부분의 마을 사람은 새마을운동의 일환으로 인근 지역에서는 다부리에 제일 먼저 생겼다고 한다. 다부리 간이목욕탕은 남녀 탕이 구분되지 않은 혼탕이었으나 대부분 남성과 여성이 목욕...
-
2009년 현재 서치마을에는 인동장씨네가 종갓집까지 해서 너덧 집이 있다. 그 서치마을에서 장상문 옹은 종갓집 7남매의 막내로 태어나 어른들의 귀여움을 많이 받고 자랐다고 한다. “7남맨가 그랬는데, 끝이라노니께 우리 누님이 나보다 일곱 살 더 먹었는데, 작년에 돌아가셨는데 장(늘) 업고 댕겼어, 날. …… (중략)…… 쪼맨할(어릴) 적에 귀염 받았지, 나는 막내고 이래 노으니께(...
-
광주이씨를 영남의 대표적인 남인 문벌로 만든 이는 이지의 현손(손자의 손자) 대에 태어난 성리학자 석담(石潭) 이윤우(李潤雨)[1569~1634]이다. 석담 선생은 아버지의 임지였던 칠곡에 정착한 이래 광주이씨를 양반가로 일으킨 중흥조이다. 석담은 대학자 한강(寒岡) 정구(鄭逑) 선생을 찾아 학문과 군자의 도를 닦아 1606년 대과에 급제하여 중앙정부에 진출했...
-
광주이씨의 시조는 이당(李唐)이다. 이당은 고려 후기 경기도 광주관아의 아전이었는데, 모시고 있는 태수 인화이씨의 사위가 된 뒤 생원시에 합격했다. 400년 아전 가문의 역사를 마무리하고 사족(士族)으로 전환한 것이다. 광주이씨 문중에서는 이당이 신라시대 칠원성 호족의 후손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당을 시조로 하는 광주이씨 외에 두문동 72현 이양중을 시조로 하는 광주이씨...
-
각산1리는 북쪽으로 비룡산과 서진산을 사이에 두고 약목면과 경계를 짓고 남쪽으로는 지경령(地境嶺)을 사이에 두고 성주군 월항면과 경계를 이룬다. 이 때문에 각산1리는 예부터 통혼권에서부터 시장 등 일부 생활문화권이 칠곡군 약목면 및 성주군 월항면과 같았다. 이런 이유로 이 두 지역을 통해 옛 각산1리의 모습을 엿볼 수도 있는 것이다. 각산1리 지역은 원래 인동...
-
풍수설에서 말하는 배산임수의 사전적인 의미는, 지형이나 방위를 인간의 길흉화복과 연결시켜, 죽은 사람을 묻거나 집을 짓는 데 알맞은 장소를 구하는 이론을 말한다. 즉 사람이 살기 좋게 바람을 막아 주고, 물이 풍부하여 사람들이 정착하며 살기 좋은 곳을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매원리는 용두산이 나지막히 마을을 감싸 돌고 있으며 동쪽으로는 장원봉이, 동북쪽으로는 도락산에서 시...
-
매원천 을 사이에 두고 매원과 소바우골 사이, 현재는 참외 비닐하우스와 논이 있는 그 곳에 예전부터 매원리 일대에서 전해 오는 말무덤 이야기가 있다. 장군과 적토마와 관련한 이야기로, 원래는 칠곡군의 낙산리 소롱골에서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이기도 한데 말무덤은 매원리에도 있었다고 한다. 왜적이 우리 국토를 유린하여 방방곡곡에 그 잔악한 횡포가 날로 심하여 가던 임...
-
각산리(角山里)는 북쪽으로 비룡산(飛龍山)과 서진산(棲鎭山)이 약목면과 경계를 짓고, 서쪽으로는 서진산 줄기가 남쪽으로 내려오면서 성주군 월항면과 경계를 이루며 지경령(地境嶺)으로 통하고 있다. 각산, 서치, 남바우, 퉁지미, 우새터, 양촌 등 여섯 개의 자연마을로 나뉘어 있는 각산1리는 지금으로부터 약 300여 년 전 인동장씨(仁同張氏) 장만중(張萬重)이 인...
-
칠곡군 동명면 기성리 232번지에 위치한 동명동부초등학교는 남원리 주민을 비롯해 동명면 5개 동 사람들의 유년을 풍요롭게 했던 장소이다. 특히 남창마을에 거주하는 사공태 옹 집안 3대에게는 더욱 잊을 수 없는 추억이 어린 장소이기도 하다. 1954년 남창마을에 수해가 났을 때 수해민들이 임시 거처로 모여 지내던 곳이기도 해서 특히나 남창마을 사람들한테는 소중한 장소이기도...
-
남창마을 입구에는 슈퍼가 하나 있다. 간판 하나 없이 그저 유리로 된 문에 ‘남원슈퍼’라고 쓰여 있는 이 소박한 슈퍼는 그래도 맞은편에 있는 구멍가게보다는 다양한 종류의 물건을 팔고 있다. 시골 슈퍼는 으레 버스정류소 역할도 하는지라, 동명면과 남창마을을 오가는 버스 노선과 시간을 알아보기 위해 들어갔더니, “내 여기서 담배장사 40년 해도 양담배 한 번 안 팔아 봤다....
-
퉁지미 에서 태어나 김천으로 시집간 지 6개월 만에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 서천댁 할머니는 모계 3대가 퉁지미를 지켜온 토박이 중의 토박이시다. “내가 김천으로 시집을 가가지고 시어머님, 시아바님도 안 계시고 사형제 쫑말이라노이(막내가 되다 보니)…… 동서 밑에 시집가가 한 달 살고 그래 약목 어디 와가 사이, 우리 부친이 60넘어 되가이…… 시방 60이라카믄은(...
-
남창마을 입구 육각정 옆에는 “벼농사 친환경(왕우렁이농법) 실증시범단지, 가산산성쌀브랜드단지, 칠곡군업기술센터”라는 현수막이 환영인사처럼 걸려 있다. 칠곡군을 대표하는 브랜드 쌀로 인증 받은 가산산성쌀은 칠곡군 축제에 빠지지 않고 참여하는 남원2리의 대표 쌀이기도 하다. 웰빙 바람을 타고 지난 몇 년간 안전적인 먹거리를 찾는 많은 사람들에게 가산산성쌀은 이제...
-
웃갓마을 할머니들은 항상 마을회관에 모여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시간을 보내신단다. 농사철이 바쁜 농번기를 제외하고는 마을회관에서 담소도 나누고, 재미삼아 고스톱도 치며 세월을 보내신다는 마을 할머니들은 예전부터 사이가 돈독했다고 한다. 할머니들이 보여주신 사진들은 대부분 친목계에서 여행을 다녀오신 사진이었다. 가까운 경주며 제주도, 그리고 해외여행까지 다녀오셨다는...
-
가산산성으로 오르는 길 양편으로 펼쳐진 남창마을 들녘은 여느 지역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돌담과 어우러져 색다른 아름다움을 선사하고 있다. 유난히도 돌이 많은 남창마을은 담도 돌, 논도 돌투성이다. 그 돌로 마을 경제의 일부분을 채워 나가기도 했다지만, 그래도 농사를 짓는 데는 이만저만한 걸림돌이 아니었을 것이다. 남창마을에서 우렁이농법으로 농사를 짓고 있는...
-
남창마을의 대표적인 마을 행사였던 동제는 원래 음력 정월 대보름 새벽에 지냈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는 마을 사람 모두가 참여하여 마을 행사로서 거창하게 지냈던 동제는 사라진 지 오래고, 해원정사 스님들이 이세재 불망비 앞에서 이세재를 기리는 제사와 함께 간략하게 정성을 드리는 것으로 대신하고 있다. 약 50여 년 전 동제의 제관을 맡은 적이 있던 사공태 옹에 따르면 남창...
-
글 읽는 소리가 늘상 울려 퍼지던 선비마을 각산1리에서 1년 중 딱 하루, 아이들이며 부녀자들의 웃음소리가 담장 밖으로 새어 나가도 꾸지람을 듣지 않은 날이 있었다. 모든 것이 용인(容忍)되던 그 날은, 음력설을 새고 정월 대보름이 되기 전의 딱 하루였단다. 1년 중 제일 큰 행사인 명절을 보내고 정월 대보름이 되기 전, 그러니까 농촌사회에서는 농한기에 해당하여 부녀자들이 제일 한...
-
1924년생인 하귀댁 할머니는 2009년 현재 여든여섯 살이다. 신동공립보통학교[현 신동초등학교] 졸업생인 하귀댁 할머니는 지금도 학교 졸업장이며 사진 등을 간직하고 계셨다. 이것저것 꺼내 보여 주시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해주시는 할머니의 모습에서 여든네 살이란 나이는 전혀 느낄 수 없었다. 웃갓마을의 할아버지와 할머니들의 나이를 보면, 적게는 예순부터 많게는 아흔아홉까...
-
장복추(張福樞)[1814~1900] 선생은 개화기 영남의 삼징사(三徵士)[장복추·김흥락·류주목]이자 삼학자[장복추·이진상·김흥락]의 한 분으로 본관은 인동(仁同)이고, 호는 사미헌(四未軒) 또는 녹리산인이다. 칠곡군 기산면 각산1리에서 태어난 사미헌은 여헌(旅軒) 장현광의 9세손이다. 여헌으로부터 내려오는 가학의 정신을 이어받은 사미헌은 조부 각헌공에게 특별한...
-
1954년에 일어난 집중 폭우의 아픔으로 새로운 마을을 건설하고 새마을운동사업에서 1등을 할 만큼 남원2리, 곧 새 남창마을의 삶은 근대화의 물결 속에서 빠르게 진행된 듯 보이지만 기실 1955년이나 현재나 집의 형태나 농사를 중심으로 하는 생업은 달라진 것이 없다. 하지만 옛 남창마을을 기억하는 마을의 어르신들이 하나둘 세상을 뜨면서 마을 축제에 가까웠던 동네의 행사들 역시 하나...
-
수해가 나서 갑자기 마을이 유실되었다고 해서 추억마저 유실되는 것은 아니다. 1954년의 집중 폭우로 인해 어느 날 갑자기 난민으로 살아야 했던 남창마을 사람들, 특히 그 당시 어린아이였다면 어릴 적 뛰놀던 옛 마을에 대한 기억은 더욱 생생할 것이다. 2008년 10월, 추수가 끝난 가을 들녘에서 사공태 옹을 만났다. 옹은 남창마을의 추억을 가장 많이 기억하고 있는 입담 좋고 마음...
-
남창마을에서 가산산성 방향이 아닌 도로변으로 나와 팔공산[일명 한티] 방향으로 오르다 보면 옻샘이 있던 곳을 찾을 수 있다. 도로변을 따라 걸어야 하는 등 찾아가는 것이 꾀까다로워 이곳까지 선뜻 안내해 주시겠다는 사람이 없었지만 다행히 장보러 가는 부녀회의 봉고차에 실려 근처까지 갈 수 있었다. 들녘의 수풀을 헤치며 간 곳에는 언뜻 보기에 두꺼비들의 천국같이 파랗게 이끼...
-
진주강씨(晋州姜氏) 시조 강이식(姜以式)은 597년인 고구려 영양왕 때 도원수로, 수나라 문제(文帝)가 이끈 30만 수군을 정병 5만으로 대파한 명장이다. 강이식은 수 년 후 수나라 문제(文帝)의 아들 양제(煬帝)가 100만 대군을 이끌고 침략할 때 을지문덕(乙支文德) 장군과 함께 살수대첩에서 승리하였다. 이후 강이식은 신라 태중대부판내이령강진이진양후에 봉해지며 본관을...
-
웃갓마을은 북쪽으로는 발암산이, 서쪽으로는 발암산의 주맥이 구릉을 형성하여 마을을 둘러싸고 있다. 동쪽으로는 멀리 우뚝 솟은 건령산의 지맥들이 남주하고 있는데, 서쪽 산록을 따라 이언천 역시 남류하고 있다. 남쪽에는 강정덤과 오지봉이 솟아 있고, 그 서남으로 경부선 철로와 국도가 나란히 관통하고 있다. 이토록 산으로 둘러싸인 상지촌은 분지에서 형성된 마을로 신동평야를 끼...
-
시골 마을 하면 떠오르는 것 중 하나가 마을 입구에 서 있는 정자나무와 마을 사람들이 모여서 쉬는 평상이 아닐까 싶다. 남창마을 입구에도 마을을 지나는 사람들을 제일 먼저 반기는 것이 커다란 느티나무와 지은 지 5~6년 된 육각정 평상이다. “여름 되면은 정자에 전부 모여 가지고 연세 많은 분들은 경로당(새마을회관), 밑에는 할머니들 경로당(노인회관), 좀 젊은 사람들은 정자에 이...
-
전국적으로 새마을운동이 활발하게 진행되던 시기, 마을길도 반듯하게 넓히고 초가지붕을 헐고 기와와 슬레이트를 올려 공중에서 사진을 찍으면 바둑판 모양으로 반듯반듯한 남원2리는 새마을운동을 잘한 1등 마을의 영광을 차지하게 되었다. 1972년부터 마을에서 슈퍼마켓을 운영했다는 송기태[68세, 남] 씨가 대단했던 당시의 모습을 떠올려 주었다. “그때 우리가 직접 초가집에 슬레이트 이고(...
-
2008년 9월 매원리 사람들은 매원천 건너편에서 골프장 반대 가두집회를 열고 있었다. 그런데 여느 집회와는 다르게 평화적으로 진행된 이번 매원리의 집회 구성원들은 모두 할아버지, 할머니들뿐이었다. 유난히 할아버지와 할머니들이 많이 거주하는 매원리는 의료보험조합에서 지정한 장수마을이며, 금연마을이기도 하다. 이는 매원마을에 거주하는 마을 사람 중 대부분이 80세 이상의 노인이며,...
-
6대째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해은고택은 매일매일 손님이 끊이질 않을 정도였다고 한다. 특히 인근 안동, 성주 등에서 여러 손님이 왔는데, 그 중 가장 왕래가 잦은 사람은 위당 정인보 선생이었다. 위당 정인보 선생은 이만환의 스승이며 벗이었다. 한국전쟁 이전 위당 정인보 선생은 1년에 한두 차례 해은고택을 방문했는데, 한 번 오면 20일에서 30일 정도 거쳐하였다고 한다....
-
1784년에 건립되었을 것이라 추측되는 양반사대부 가옥 경수당은 벽진이씨 후석파 종택이다. 지붕의 망와에 ‘청 건륭 49년(1784)’ 또는 ‘도광(道光, 1821~1850)’이라고 명문을 새긴 것이 있어 18세기 말에 처음 지은 후 19세기 중엽에 수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웃갓마을 북쪽 끝에 위치하는 경수당 뒤편으로는 나지막한 동산이 자리 잡고 있다. 경수당은 벽진이...
-
인동장씨는 지금으로부터 약 300여 년 전 여헌 장현광(張顯光) 선생의 증손 4형제, 곧 만중(萬重)을 비롯한 만취, 만익, 만성이 인동 남산에서 양촌(陽忖)으로 옮겨 살다가 각산에 정착하였다고 한다. 마을 주민 장세완 씨에 따르면, 장세완 씨의 11대조인 소매당 장벽의 묘소를 시작으로 1700년대부터 마을에 인동장씨가 거주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인동장씨가 각산1리에 거...
-
매원리를 찾은 11월의 어느 날, 마을을 지키기 위해 사람들이 마을 입구에 천막을 친 채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던 곳에서 박화자 할머니를 만날 수 있었다. 단아한 모습에 입을 가려 웃으시는 모습마저 꼭 소녀 같은 박화자 할머니는 1931년 일본 동경에서 태어났다. 한국이 워낙 가난했던 시절, 할머니의 부모님은 일본으로 이민을 선택하셨고 그곳에서 박화자 할머니를 낳게 된다...
-
하귀댁 할머니는 밀양이 고향이다. 따라서 택호는 밀양댁이어야 하지만 같은 동네에 사는 큰올케가 이미 밀양댁으로 불리고 있었기에 하귀댁으로 불린단다. 고향이 밀양 하귀동[정확한 명칭은 아닌 것으로 밝혀짐]이었던 할머니는 자신보다 네 살이 많고 시누이가 셋이나 되는 할아버지에게 시집을 오게 된다. 열다섯 살 때의 일이었다. 할머니가 시집 올 때는 상답에 검정고무신을 넣었다고...
-
매원리는 칠곡군 왜관읍에서 약 4㎞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북쪽으로 나직한 용두산이 마을을 감싸듯 서 있으며, 동쪽으로는 장원봉(壯元峰)이 피라미드 모양으로 우뚝 솟아 경관을 이루고 있다. 장원(壯元)이란 고려·조선시대 과거의 최종 시험에 수석으로 합격하는 것을 말한다. 조선시대에는 문과·무과의 최종 시험인 전시(殿試) 합격자를 갑과·을과·병과로 나누어 갑과에 뽑힌 3인...
-
서천댁 할머니는 현재 비룡사 앞에서 소를 키우며 사시는데, 이전에는 대흥사 앞에서 살았다고 한다. 불심이 강한 할머니는 조모 때부터 내려온 전설 같은 산골 이야기들을 많이 알고 계셨다. “옛날에 우리 조모, 내게 할매…… 저 안에 큰 골이라고 저 안에 살 때는 호랭이가 새끼를 쳤어요. 우리 조모가 살았으면 한 150도 넘겠나. 나 열한 살인가 열두 살 때 조모가 세상을...
-
남문을 통해 가산산성을 오르다 보면 해원정사라는 절이 나온다. 그리고 이 절의 대웅전 뒤편에 가산산성을 쌓은 관찰사 이세재[1648~1706]의 불망비가 서 있다. 이세재는 1698년(숙종 20) 11월 20일에 경상도관찰사로 부임하여 1700년 가산산성 외성을 완성하였다. 당시 그는 임기가 만료된 뒤에도 성을 쌓기 위해 계속 있다가, 1701년 2월 8일 예조참의로 전...
-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75호로 지정된 해은고택은 이동유(李東裕)[1768~1836]가 1788년(정조 12)에 건립한 가옥이다. 사랑채는 1816년(순조 16) 건립되었고, 손자인 이이현(李以鉉)의 호를 따라 해은고택이라 하였다. 해은고택은 이동유(李東裕)[1768~1836] - 이연운 - 이이현(李以鉉) - 이철연(李喆淵) - 이상유(李相遊) - 이만환(李萬煥) - 이수전(李壽...
-
다부동전적기념관 앞에는 조지훈의 시 「다부원에서」가 새겨져 있다. 전후 대부분의 종군 작가들은 전쟁의 참상과 폐허를 노래하며 승전의식 고취와 반공의식 앙양에 힘을 기울였던 게 사실이다. 조지훈 시인의 경우도 크게 예외는 아니었다. 하지만 조지훈의 시 「다부원에서」는 단순한 전쟁 시가 아니라 차원 높은 휴머니즘이 담겨 있다. 한 달 동안 농성 끝에 나와 보는 다...
-
현재의 다부 초등학교가 다부 국민학교로 불리던 시절, 학교는 조그만 단층으로 교실 두 칸 밖에 없었다. 운동장 한가운데에 논이 있었지만, 마을 사람들에게는 아이들 공부를 시킬 수 있는 학교가 마을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자랑스럽던 시절이었다. 1949년 9월1일 다부 초등학교는 남자 45명, 여자 25명으로 총 70명의 1학년 학생들과 처음 개교를 했고, 1955년 67명의 1회 졸업...
-
김광순의 『한국구비문학』에 따르면, 웃갓마을에는 오인석강씨가 살고 있었다고 한다. 웃갓마을 주민 강재희 옹에게서 오인석강씨라 불리게 된 연유를 들었다. “왜 오인석이냐면 이 마을에 방구(바위)가 5개 있는데, 방구(바위)를 따가지고 이곳에 사니깐 오인석이라고 지은 거야. 오인석강씨 유래가 요 마을에서 난 거다. 시방(지금) 사는 강씨는 진주강씨라.” 그러니까 강재희 옹의...
-
웃갓마을 하귀댁 할머니는 밀양에서 천석꾼의 딸로 태어났다. 그러나 현재 할머니가 사시는 곳은 천석꾼의 딸이라는 말이 무색할 만큼 아주 소박한 곳이었다. 마당이 아주 넓은 몇 백 년 된 가옥에서 평생을 사시고 계신다면서 집을 자랑하시는 할머니의 모습에서 소박한 인정이 느껴졌다. 하귀댁 할머니를 낳아준 어머니는 돌아가신 아버지의 후처였는데, 전모(前母)가 돌아가시...
-
초당방은 집의 원채에서 따로 떨어진 곳에 억새나 짚 등을 엮어 지붕을 만든 조그마한 집채로서, 사랑방과는 달리 주로 그 집안에서 일하는 머슴이나 하인 등이 거주하는 방을 말한다. 약목댁 할머니 말에 따르면, 웃갓마을에 있던 초당방이 누구네 집에 딸린 것인지는 잊어버렸으나 낙화담 아래에 있어서 동네 아이들이 삼삼오오 모여 놀곤 했다고 한다. “저 위에 있었는데…… 낙화담 밑에, 학교...
-
선비마을이라 마을에서 주민들끼리 어울려 놀아 본 적이 없다는 아랫마을과 달리, 서치마을의 경우 인동장씨 네가 몇 가구 살기는 하지만 산에 올라가 기우제도 지내고 정월 대보름 달집도 태우는 등 1년 내내 다양한 행사가 열렸다고 한다. 서치마을에서 가장 나이가 많으신 장상문 옹이, 해방되기 전에는 마을에 심한 가뭄이 들면 무제라고 하는 기우제를 지냈는데, 해방이 되고 차차...
-
남원리는 원래 칠곡군 하북면 지역이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남창·하원·양지 일부를 병합하여 남원동으로 이름하고 현 동명면에 편입되었다. 옛 남창마을과 관련하여 전하는 자료는 많지 않다. 1954년의 집중 폭우로 인해 마을이 거의 사라지다시피하여 그 이후 새로운 남창마을을 만들었다는 기록을 제외하고 100년 전, 200년 전 이야기는 찾아볼 수 없다. 그나마 가...
-
1970년 4월 22일 당시 대통령이었던 박정희가 전국지방장관회의에서 새마을가꾸기운동을 제창하여, 1971년부터 새마을가꾸기운동은 전국적 범위로 확대되었다. 이 사업의 일환으로 새마을운동중앙회가 사단법인으로 발족되었는데, 이로써 새마을운동은 정부 추천방식에서 민간조직(단체) 위주로 탈바꿈되는 중요한 전환점이 된다. 당시 새마을운동중앙회는 새마을운동을 효율적으로 펼쳐나가기 위해 6개...
-
1946년 한국으로 귀국한 박화자 할머니는 지독한 가난으로 생활고를 겪게 된다. 그러던 중 박화자 할머니에게 중매가 들어왔는데, 신랑이 될 사람은 종갓집 장손으로 나이가 50이 되도록 장가를 가지 못해 이곳저곳으로 선을 보러 다녔다고 한다. 박화자 할머니의 마을에 살던 그의 친누나가 중매쟁이를 그녀의 부모님에게 보내서는, 신랑감의 나이는 40이나 집 한 채와 논 네 마지기, 밭 3...
-
진주강씨 박사공파 후손인 강재희 옹은 웃갓마을에서 키 큰 할아버지로 통한다. 지금도 손자들에게 족보며 문중 공부를 가르치신다는 할아버지는 하루 4~5시간 게이트볼을 치시고도 다리에 힘이 없어 다리 힘을 길러야 한다며 오토바이 대신 자전거를 구입해 타고 다니신다. 강재희 옹은 3형제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할아버지의 3형제 중 큰아들은 아들이 없는 큰아버지의...
-
장석영(張錫英)은 1851년 10월 24일 조상 대대의 세거지인 칠곡군 약목면 각산동에서 참판을 역임한 장시표의 아들로 출생하여 1926년 6월 8일 향년 76세로 졸하였다. 자는 순화(舜華) 또는 중범(仲範)이며, 호는 회당(晦堂)이나 처음에는 추관(秋觀)이라 하였다. 한주(寒洲) 이진상(李震相)을 스승으로 모신 장석영은, 이진상의 이른바 성리학(性理學)과...
-
다부동전투 는 대구를 지켜낸 참혹하면서도 빛나는 전투였다. 8월 13일부터 12일간 잘 훈련된 북한군은 유학산 밤의 주인이었다. 그리고 낮에는 미 공군의 지원과 군수를 지원 받은 아군이 그 주인 역할을 하였다. 이렇게 밤낮으로 주인이 15번이나 바뀌는 328고지 전투와 가장 희생자를 많이 냈던 837고지 탈환전 등 55일간 전투가 계속됐던 다부동전투는 한국전쟁...
-
1950년 6월 25일 일어난 전쟁 발발 후 3일 만에 서울은 점령당했다. 그리고 25일 만에 다시 대전을 점령당하여 한국군은 한 달 만에 낙동강까지 후퇴했다. 대구는 당시 대한민국의 임시수도였으며 한국의 모든 부처(部處) 및 미8군 사령관과 육군본부, 해군본부 등의 사령부가 내려와 있었다. 7월 29일 미8군 사령관 워커 장군은 북한군의 공격에 대한 최후의 방어선으로서, 낙동강과...
-
지난 2008년 9월 남원2리를 방문하니 마침 추석을 맞이하여 남창마을노인회 회원분들이 마을 대청소를 하느라 정신이 없을 정도로 바쁘게 움직였다. 누구는 일곱 포대나 쓰레기를 주웠다더라 하는 소리도 들리고, 또 가산산성 쪽에서 내려오시는 어르신 한 분이 “등산객들이 허옇게 버려 놨더라…….” 하시며 지나가는 걸 보니 대청소 범위가 만만찮은 듯했다. 동명면에서는 매월 청소...
-
웃갓마을에 있는 사양서원(泗陽書院)은 한강(寒岡) 정구(鄭逑)[1543~1620]를 주벽으로 모시고 1년에 한 번 향사를 모시는 곳이다.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학자인 정구의 자(字)는 도가(道可)이고, 호(號)는 한강(寒岡)이며, 시호(諡號)는 문목(文穆)이다. 본관(本貫)은 청주(淸州)이다. 오건(吳健)에게 수학하고 조식(曹稙)과 이황(李滉)에게서 성리학(性理學)을 배...
-
1931년 동경에서 태어난 박화자 할머니는 1946년 3월 13일 타지에서의 외로움 때문에 한국으로 귀국하게 된다. 한국에 들어온 그녀는 대일청구권이라는 제약으로 일본에서 벌어온 돈을 쓸 수 없게 되자, 매우 가난한 생활을 하게 되었다. 생계는 어머니가 일본에서 입던 한국 옷을 팔아 양식을 구하는 것으로 이어갔고, 그녀는 더 이상 공부를 할 수 없게 되었다. 한국으로 귀국을 하면서...
-
다부동은 안동으로 가는 국도 5호선과 만나는 마을 안길에서 자연마을인 진목정(眞木亭)으로 가는 길 사이에 있는 마을이다. 지금은 중앙고속도로와 다부 IC가 생겨 다부동전적기념관 쪽으로 마을이 형성되었으나, 한국전쟁 이전 마을의 중심은 현재 마을의 아래 쪽이고, 마을의 입구도 진목정으로 가는 마을 아랫길을 시작되었다. 한국전쟁 이전에 동제나무는 마을의 입구인 동시에 마을이...
-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의 남침으로 일어난 한국전쟁 당시에 다부동전투는 다부동에서 우리나라 군인들이 미군과 더불어 북한군 3개 사단을 격멸한 전투이다. 55일간 벌어졌던 다부동전투는 적군 17,500여 명과 아군 10,000여 명의 사상자를 낳았던 곳이기도 했다. 이같이 치열했던 전쟁을 겪은 후 다부동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마을 사람들은 당시를 이렇게 기억하고 있었다. “...
-
매원리에서 태어나고 자란 이동진 씨에 따르면, 약 500여 년의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매원마을의 번창기에는 300여 채의 한옥과 200여 채의 초가집이 들어서 있었다고 한다. 2009년 현재 매원마을에 남아 있는 전통가옥은 60여 채 정도 되나, 대부분 형태를 변화시켜 실제 매원마을에 보존되고 있는 고가는 몇 채 되지 않는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300여 채의 전통가옥...
-
각산1리에는 사미헌 선생 외에도 훌륭한 인물이 많다. 사미헌 장복추[1815~1900] 선생은 은일(隱逸)[벼슬에 나아가지 않은 사람에게 내리는 벼슬]로 경상도도사와 가선대부부호군으로 개화기 유학의 선비들이 우러러보는 큰 학자였다. 장시윤은 의금부도사를 지냈고, 장응표[후에 시표로 이름을 바꿈]는 문과에 급제한 뒤 이조참판을 지냈다. 장지복, 장대지 등은 천(...
-
정순덕 할머니는 부녀회 활동을 하면서 칠곡군 및 각 기관 부처의 지원금을 받아 마을 사람들의 복지생활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특히 새마을운동 당시 칠곡군의 지원을 받아 영양센터를 건립하였는데, 영양센터는 마을의 공동 방앗간 구실을 하였다고 한다. 영양센터는 방앗간뿐만 아니라 구판장 역할도 해서 부녀회 공동사업으로 담배나 간단한 생필품을 팔았다. 영양센터...